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까디시야 전투 (문단 편집) === 페르시아 군대 === 페르시아군의 경우 4만 명, 6만 명, 10만 명, 12만 명에서 20만 명까지 설이 매우 많은 데다 소스도 부족하기 때문에 이슬람 군대에 비해 그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다. 어찌됐든 페르시아군의 수가 이슬람군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라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그 전체 군사력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보자면 훨씬 적었다. 물론 제국이 워낙 넓다 보니 이라크 말고도 방어해야 할 다른 땅이 많다는 것도 한 이유이지만, 더 큰 이유는 아직 사산 왕조가 혼란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많은 페르시아 귀족들이 로스탐을 돕지 않고 자기 땅에 할거하며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으며, 로스탐 입장에서도 그들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로마와의 오랜 전쟁은 물론 내부의 권력 투쟁을 겪고, 이슬람군에게 연전연패를 당해 병력자원의 고갈이 극심했다. 하지만 이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그 넓은 땅덩이 덕택에(...) 이슬람군에 비해 우월한 전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 군대는 크게 보병, 경기병, 중기병, 코끼리 부대로 나눌 수 있다. 보병은 이전 시대의 [[아케메네스 왕조]]나 [[파르티아]]와 마찬가지로 대량으로 끌어모은 징집병이었으므로 빈약한 장비를 갖춘 오합지졸이었다. 그러나 궁병이 많았으므로 사격전은 기대해볼 만한 수준이었다. 고르간(이후의 타바리스탄)이나 데일람 등지에서 온 중장보병들도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보조 전력이었으며, 제국 중심지의 페르시아인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르메니아의 연대기에 따르면 이때 아르메니아 분견대도 페르시아군에 가세했다고 하는데, 로스탐의 원래 거점이 아제르바이잔으로 아르메니아와 상당히 가까운 데다 그가 일전에 아르메니아를 정복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병은 경기병과 중기병으로 나누어지며, 경기병은 대다수가 궁기병이었다. 그러나 사산 왕조의 경무장 궁기병들은 대부분 다른 유목민들로 구성되었으므로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페르시아군의 실제 주력은 늘 그렇듯이 중기병, 즉 [[카타프락토이]]였다. 중기병들은 대부분 귀족으로, [[찰갑]]과 사슬갑옷, 혹은 그 둘이 혼합된 형태의 갑옷을 입고 말도 마갑을 입혀서 중무장했으며, 창과 활, 도끼, 칼 등을 사용했다. 그러나 등자나 카우치드 랜스 방식이 널리 도입되기 전이므로 중세 [[기사]]들과 같은 충격력을 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마르켈리누스의 기록을 보면 카타프락토이의 돌격이 로마군 중보병 2명을 꿰뚫은 정도의 위력을 보였다했기에 카우치드 랜스나 등자 없이도 상당한 충격력을 보였다는 걸 알 수 있다.]전투 코끼리 역시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역대 페르시아 군대 중에서도 사산 왕조만 가지는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다.[* 페르시아 문화권 전체로 넘어가면 [[가즈나 왕조]]나 [[티무르 제국]]이 코끼리를 적극적으로 운용한 예가 있으나, 이들의 중심지는 트란스옥시아나나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가까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